납북귀환어부와 가족이 입은 피해는 귀환 직후의 처벌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북공작 동원과 간첩조작, 감시와 사찰, 연좌제와 사회적 낙인은 수십 년 동안, 때로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습니다.
납북은 어부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납치를 피해 달아나다 북한의 총격에 배가 가라앉아 숨진 어부도 있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 어부도 있었습니다. 억류된 어부들은 출신 지역의 관공서와 군경 배치, 물가 등에 대해 조사를 받은 뒤 공장과 농장 견학, 체제 선전 교육에 끌려다녔습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1년 넘게 억류되었고, 억류 중 시달림을 못 이겨 목숨을 끊은 어부도 있습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어부는 457명에 이릅니다.
남겨진 가족은 가장을 잃은 채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공안당국은 어부들이 ‘자진 월북해 환대를 받고 돌아온다’고 주장했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로 어부들이 북한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납북된 납치 범죄의 피해자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돌아온 어부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전략심문’이었습니다. 해군방첩대,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등 많게는 10개 기관이 참여한 합동심문반이 여관이나 시청, 관공서 건물에 어부들을 가두고 북에서 받은 ‘지령’을 캐물었습니다. 구속영장은 없었습니다.
귀환 직후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되기까지 수일에서 수십 일 동안 불법으로 갇혔습니다. 1969년 귀환한 150명, 1972년 귀환한 160명 모두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지령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다 받았는데 너만 거짓말한다”며 구타했습니다. 몽둥이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가 이어졌습니다.
수사기관은 어부들이 어로저지선과 군사분계선을 스스로 넘었다고 자백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객관적 증거는 없었고, 유일한 증거는 강요된 진술이었습니다.
북에서 보고 겪은 일이 그대로 범죄가 되었습니다.
수사기관은 억류 중 어쩔 수 없이 보고 겪은 일을 ‘북한을 찬양·고무했다’, ‘금품을 받았다’는 범죄 사실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강요된 자백을 근거로 반공법(탈출, 찬양고무), 국가보안법(금품수수), 수산업법 위반으로 기소했습니다.
| 북에서 보고 겪은 일 | 수사기관이 만든 ‘범죄 사실’ |
|---|---|
| 끌려간 공장을 보고 “규모가 크다”고 말함 | “공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되었으며, 이렇게 건설하느라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북한을 찬양·고무 |
| 단체로 관람한 선전 영화·연극에서 박수를 침 | 북한 체제 선전물에 박수를 쳐 찬양·고무 |
| 억류 중 지급받은 옷가지와 귀환 때 받은 과자 | 신사복 한 벌, 과자 두 상자 등을 받은 금품수수 |
| 북한 경비정에 끌려감 | 스스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탈출 |
당시에도 일부 법원은 찬양고무와 금품수수가 “생명과 신체의 안전, 무사 귀환을 위해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의해 강요된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더 강한 처벌을 요구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반공법 탈출죄가 유죄로 인정되기 시작해 15살 소년까지 처벌받았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찬양고무’와 ‘금품수수’가 북한의 협박에 의한 강요된 행위이거나, 귀환 후 가혹행위로 받아낸 임의성 없는 진술이라고 결정했습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한 1,288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829명입니다. 징역형으로 옥살이를 한 선장과 기관장이 많았고, 집행유예를 받은 선원들도 평생 ‘전과자’라는 굴레를 썼습니다.
국가는 납북귀환어부를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공작의 도구이자 ‘간첩 후보’로 다루었습니다.
‘역용공작’은 북에서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한 귀환어부를 거꾸로 이용해, 지령을 수행하는 척하며 접촉해 오는 간첩을 잡으려는 공작입니다. 보안대·경찰·대북첩보부대는 전략심문 단계부터 역용공작에 쓸 수 있는 어부를 골라냈습니다.
본인의 동의도, 법적 근거도 없이 일반 국민을 위험한 대북 첩보활동에 동원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자 반인간적 국가폭력입니다.
군 보안대와 경찰 정보과는 귀환어부 가운데 간첩을 찾아내겠다며 공작명을 붙인 내사와 공작을 수십 년간 이어갔습니다.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군 보안대의 사찰, 범죄를 유도한 함정수사, 증거 조작은 모두 불법입니다.
귀환한 지 10년, 17년이 지난 뒤 영장 없이 다시 연행되어 수십 일 동안 불법구금된 채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된 어부들이 있습니다. 1970~80년대 전주·인천·고성·거제 등지에서 보안대와 경찰, 안기부가 이런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납북귀환어부들은 좌익사상범처럼 취급되어 사상전향서를 쓰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전향을 거부하면 가석방에서 제외되는 등 불이익이 따랐습니다. 억울하게 납북되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이적행위를 했으니 전향하라’는 요구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상전향제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 속에 1998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감시와 사찰은 형사처벌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납북귀환어부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형사처벌은 끝나는 날이라도 있었지만, 법적 근거 없는 사찰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신원조회에 걸려 공무원, 경찰, 공공기관, 방위산업체, 대기업 취업에서 탈락했습니다. 스튜어디스에 합격하고도, 경찰 필기시험을 통과하고도 떨어졌습니다.
선원수첩이 나오지 않아 선장이 되거나 큰 배, 외항선을 탈 수 없었습니다. 1971년에는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984명을 어선에 태우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려졌습니다.
중동 건설 붐 때도 신원조회로 해외 취업이 막혔고, 진학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의 일로 자녀 세대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언니는 공무원이 되려고 시험을 봤다. 두 번씩이나 신원조회에서 탈락했다. 나도 번듯한 회사에는 취직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한다’며 ‘내가 죽어야만 너희가 피해를 보지 않을 텐데’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 건설호 납북귀환어부의 딸 김○애 씨 증언, 『통곡의 바다, 짓밟힌 희망』
형사가 수시로 드나드는 집은 마을에서 ‘간첩 집안’이 되었습니다. 친척들은 피해를 입을까 왕래를 끊었고, 가족은 이웃과 어울리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피해자 가운데에는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 진실규명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국가폭력이 남긴 상처는 몸과 마음, 가족 관계와 지역 공동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 상처는 피해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가족과 다음 세대가 함께 짊어져 온 짐입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위와 같은 피해를 겪었다면 진실규명 신청과 재심, 손해배상을 통해 피해회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피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상담을 신청해 주세요.
참고자료 · 엄경선, 『통곡의 바다, 짓밟힌 희망』(강원민주재단, 2024) 제2부 ‘납북귀환어부들이 겪은 국가폭력’, 『진실의 힘, 희망을 빚다』(강원민주재단, 2025)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 결정문